어머니의 편지 꾸러미

by오광신 2002.03.2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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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08.05.29.jpg

 

아래 포스팅을 올린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세월호 사고 뉴스가 한창이던 2014년 봄에 어머니는 80의 나이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홈페이지를 다듬다가 문득 생각나서 다시 읽어 봅니다.

생전에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자주 찾아보지 못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남겨진 사진 조차도 몇장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2년 뒤면 칠순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의 장롱 속에는 중요한 꾸러미가 몇 개 있습니다. 돈 꾸러미가 아니라 평생을 똑같은 필체로 써온 당신의 일기장, 출납대장, 교양서적들, 편지 꾸러미가 그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 중에서도 편지꾸러미는 우리 집안의 막동이가 보냈던 것들이 한 묶음 있습니다. 당시 막동이가 편지 겉봉에 정성들여 큼지막하게 보냈던 여러 공사현장들 주소를 보니 슬픈 어머니의 인생사가 떠오릅니다. 겉봉의 주소들은 대구의 XX아파트 건설현장, 경남 창원의 무슨 XX건설현장, 서울 서초구 XXX건설현장 xx식당, 부산시 개금동 XXX씨 댁 등 다양한 주소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 주소와 편지 꾸러미들을 물끄러미 바라 보며 어머니의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처럼 막동이에게도 군대와 비슷한 학창 시절이 있었습니다. 막동이가 입학한 한국해양대학교는 입학과 동시에 ROTC에 입단해야 하므로 선후배 관계 꽤 힘들었습니다. 사관학교 정도가 아니었으니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기대했을 겁니다. 설마 1학년부터 깐깐한 생활을 할줄은 몰랐었습니다. 당시에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녀석이었고 부산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막동이 촌녀석에게 주말은 해방이어야 하는데 주말이 되어도 갈 곳이 없어 고민이었습니다. 다짜고짜 친척이나 형제들에게 폐끼칠 수 없으니 마땅히 갈곳 없는 외로운 존재였습니다. 형제들도 각자 열심히 사는 마당에 대학 씩이나 다니는 촌녀석은 어떻게든 버텨야 했습니다. 그러하니 용돈마저 별로 없으니 그냥 외로운 존재였습니다.


막동이한테 아버지는 기억에 없던 시절에 일찍 돌아가셨고 오남매의 막동이에게 오직 어머니 만이 정신적 지주이자 돈줄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혹시나 바랬던 수업료가 무료인 국립대학교에 들어가게 된것은 막동이의 행운이었습니다. 어머니 혼자서 농사를 하며 수업료 외의 학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므로 농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당시에 달랑 한 필지 논으로는 학비 감당이 안되었고 현재에는 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당시 60 대의 할머니 같은 체력에도 불구하고 도시로 나가서 식당일이든 식모일이든 하겠다는 모진 결정을 한 것입니다. 60살은 은퇴의 나이인데도 60 넘은 할머니 같은 분이 늦둥이라는 가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처절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새끼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키우겠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당시에 도시에 살던 형들이 몇 있었지만 한참 가정을 꾸려야 했으니 동생한테 학비를 보태줄 형편이 안되었고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머니를 잘 챙기는 형이 있지만 형제들도 어머니를 돕다가 겨우 정착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당신도 막동이 학비마저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식들 사정이 그렇다보니 막동이가 졸업할 때까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버텨야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농사 말고는 할줄 모르던 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잘 사는 가정집의 식모나 식당일이 전부였습니다. 막동이도 대학에서는 기죽지 않으려고 어머니의 직업에 대해서는 어떤 친구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막동이 처럼 어려운 처지를 말하는 친구도 일부 있었지만 막동이는 없어 보이는 가정사(!)를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생활의 씀씀이 조차도 일부러 빈티를 내지 않으려고 용돈이 필요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요청하여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습니다. 막동이는 어머니가 이왕 고생하시니깐 최소한 생활할 만큼 돈을 쓰자는 생각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50만원 월급 받으면 50만원을 그대로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았습니다. 백퍼센트 자식을 위해서 모았고 최소한 막동이 졸업식까지는 벌어야 겠다고 했으며 버는 족족 자식들한테 썼습니다.

막동이는 당시에 일기를 쓰기나 편지를 자주 쓰던 터라 거의 한달 간격으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안부와 잡다한 대학 생활 이야기를 보냈습니다. 말 그대로 촌놈이 대학생활에서 새롭게 느끼던 사소한 이야기를 주로 썼습니다. 어머니가 일하던 곳은 "함바"라고 불리는 공사장 가건물 식당이었는데, 주소가 불분명한데도 막동이가 편지를 보내면 한 통도 빠짐없이 전국의 어느 공사장 식당이라도 신기하게 어머니의 손에 배달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모자간의 정을 아셨는지 막동이가 보낸 편지는 한 통도 빠짐없이 어머니한테 배달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키가 150 정도로 꽤 작고 얼굴도 힘없어 보이는 인물이지만 정신력은 정반대로 초금속보다 단단하였습니다. 전국 공사장 함바 식당을 오가는 사람들이 거칠더라도 자식에 대한 책임 때문에 무조건 버텨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예상되는 파란만장한 시련을 생각했는지 여자들이라면 다 쓰는 브래지어 한 개도 없이 살았습니다. 오남매를 키우는 동안에는 입에 풀칠하기 조차 힘들었으니 생전에 놀러갈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을 정도로 모진 분이었다.  함바 공사장에 막동이가 하얀 제복을 입고 먼지나는 공사장에 나타나면 어머니에게 커다란 자부심과 정신력이 충전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막동이가 제복을 입고 다녀가면 어머니를 얕보던 몇몇 인부들이 이후부터는 빈정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은 겉보기에 못나게 보이더라도 자식 하나라도 똑바로 키우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있으니 허투루 접근하지 말라는 신호였습니다.

 

막동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 장교로 간 뒤에도 어머니한테 편지를 계속 보냈습니다. 막동이는 군장교로 있는동안 월급을 받으며 생활했으므로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 없었으나 어머니 스스로 자립하겠노라며 이후로 무려 10년 더 식모생활을 하였습니다. 60대 중반의 할머니 같으신 분이 자식 신세는 커녕 완전 자립을 목표로 자식들한테 뭐라도 보태줄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자식들이 어렵게 출가했으니 남은 자식의 결혼도 시키고 어릴적부터 밥벌이를 위해 쫓아낸 자식들한테까지 진 빚을 갚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집 떠나 객지에서 10년 가까이 돈 벌다가 결국에는 외롭게 시골로 돌아가서 혼자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생을 자식만을 바라보며 여유없이, 빈틈 없이 살아온 탓에 작은형 집과 막동이 집에서 몇 달 살아 보더니 "함께 못살겠구나" 하시며 스스로 시골로 가셨습니다. 죽을 것처럼 살아오신 분이 자식 내외와 잘 어울리기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혹독한 고생을 참아가며 공사장 식당과 식모생활을 해서 돈을 모았으니 자식들한테 신세 안지고 잘 살겠노라고 강조합니다. 막동이의 학비를 벌기 위해 식모생활, 함바에서 고생을 더 했으니 막동이는 매달 10만원씩 꼭 보내라고 합니다. 10만원이라는 돈 보다는 너를 위해 책임을 다했으니 보답으로 막동이도 어느 정도의 의무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 식구들과 어울리지 못하여 따로 사는 것에 대해 미안하고 창피하게 생각을 하며 그냥 살아갑니다. 막동이는 막동이대로, 형제들도 멀리서 각자 편하게 지내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사는게 낫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본심은 다르기 때문에 막동이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남매의 자식이 있지만, 어머니는 자식마다 각기 다른 인물과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막동이는 대부분 그렇듯이 집안의 귀여운 강아지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막동이는 어릴적부터 어머니가 멀리 외출하거나 시장에 물건을 팔러 갔다가 돌아올 즈음이면 거의 빠짐없이 마중을 나가곤 했습니다. 밭을 매거나 논일을 하면 일하는 내내 잡다한 이야기를 하거나 노래를 불러서 어머니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려고 떠들었습니다. 때로는 논일을 하면서 맨날 일만 하냐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맨날 집에서 공부하는데 막동이도 최소한 시험 전날에는 공부시간을 달라고 해서 어머니 혼자만 일하게 놔두고 막동이 혼자서 집에서 놀기도 했습니다. 막동이 양심에도 공부하겠다고 했으면 최소한의 공부라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막동이가 졸라대는 자습서도 못사주고 공부할 시간도 별로 안주면서도 시험을 치고나면 반에서 5등 안에는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부할 여건도 별로 안주면서 성적에는 왜 집착했는지 모르지만 공부도 별로 안하고 대학까지 나왔으니 막동이는 나름대로 선방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이런 저런 이야기가 쓰여진 막동이가 보냈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면 힘이 난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라기 보다는 아버지처럼 그 정신을 본받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막동이는 어느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고 어머니한테도 편지를 써 본지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두어달 전에는 어머니께 인터넷으로 편지를 쓰면 인터넷편지배달 회사가 대신 편지를 보내주는 편지를 썼습니다. 대신에 편지 봉투에 광고가 달라붙는 게 맘에 걸리지만 아나로그 감성을 불러내기에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전단지 광고인 줄 알고 개봉도 하지 않다가 며칠 뒤에 열어 보시더니 오랜만의 편지에 좋아했습니다. 자식들이 떨어져 지낼 수록 자주 찾아볼 수 없다면 꾀를 내어 편지나 전화라도 하면 좋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엔 당신이 나이가 들 수록 자식들한테 사랑 확인을 가끔씩 하십니다. 아직도 어머니를 쥐꼬리 만큼이나 생각은 하고 있냐고, 어머니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냐고.


"너그떨 아직도 어머니 생각하고 있냐 ? 난 너그떨이 어머닐 잊어버린 줄 알고..."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에 자식에 관한 것 외에는 없습니다.

시골에서 혼자 소일하다 너무 힘들면 그 때마다 자식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십니다. 

그 등살에 며느리들은 죽을 맛이지만 혼자 사시는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충실하게 헌신적이던 막내형한테는 심한 고부관계로 인해 가정상황이 좋지 않지만, 식구를 위한 어머니의 필살기 노력을 생각한다면 막내형도 언젠가는 극복하리라 생각합니다.  

막동이는 아버지가 되어어 비로소 부모의 존재이유를 조금 깨달았고 어머니의 헌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 혹독한 수십년을 버텼는데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바라면서 혹독한 세월을 버텼을까요?. 어머니께 할 수 있는 효도는 아주 쉬운데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다짐을 하지만 뒤돌아 서면 또 잊어버리는게 자식의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번에는 한번 편지를 써보겠노라고 다짐합니다. 자식의 편지를 읽으며 잠시라도 기뻐할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2002년 4월 광팔이라는 막동이가 씀]


 

 

 

  1. A cup of coffee with a Friend

    by 오광신 2009.09.03 0 Comments
  2. 어머니의 편지 꾸러미

      아래 포스팅을 올린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세월호 사고 뉴스가 한창이던 2014년 봄에 어머니는 80의 나이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홈페이지를 다듬다가 문득 생각나서 다시 읽어 봅니다. 생전에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자주 찾아보지 못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남겨진 사진 조차도 몇장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2년 뒤면 칠순이 다 되어가는 어머니의 장롱 속에는 중요한 꾸러미가 몇 개 있습니다. 돈 꾸러미가 아니라 평생을 똑같은 필체로 써온 당신의 일기장, 출납대장, 교양서적들, 편지 꾸러미가 그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 중에서도 편지꾸러미는 우리 집안의 막동이가 보냈던 것들이 한 묶음 있습니다. 당시 막동이가 편지 겉봉에 정성들여 큼지막하게 보냈던 여러 공사현장들 주소를 보니 슬픈 어머니의 인생사가 떠오릅니다. 겉봉의 주소들은 대구의 XX아파트 건설현장, 경남 창원의 무슨 XX건설현장, 서울 서초구 XXX건설현장 xx식당, 부산시 개금동 XXX씨 댁 등 다양한 주소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 주소와 편지 꾸러미들을 물끄러미 바라 보며 어머니의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처럼 막동이에게도 군대와 비슷한 학창 시절이 있었습니다. 막동이가 입학한 한국해양대학교는 입학과 동시에 ROTC에 입단해야 하므로 선후배 관계 꽤 힘들었습니다. 사관학교 정도가 아니었으니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기대했을 겁니다. 설마 1학년부터 깐깐한 생활을 할줄은 몰랐었습니다. 당시에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녀석이었고 부산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막동이 촌녀석에게 주말은 해방이어야 하는데 주말이 되어도 갈 곳이 없어 고민이었습니다. 다짜고짜 친척이나 형제들에게 폐끼칠 수 없으니 마땅히 갈곳 없는 외로운 존재였습니다. 형제들도 각자 열심히 사는 마당에 대학 씩이나 다니는 촌녀석은 어떻게든 버텨야 했습니다. 그러하니 용돈마저 별로 없으니 그냥 외로운 존재였습니다. 막동이한테 아버지는 기억에 없던 시절에 일찍 돌아가셨고 오남매의 막동이에게 오직 어머니 만이 정신적 지주이자 돈줄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혹시나 바랬던 수업료가 무료인 국립대학교에 들어가게 된것은 막동이의 행운이었습니다. 어머니 혼자서 농사를 하며 수업료 외의 학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므로 농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당시에 달랑 한 필지 논으로는 학비 감당이 안되었고 현재에는 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당시 60 대의 할머니 같은 체력에도 불구하고 도시로 나가서 식당일이든 식모일이든 하겠다는 모진 결정을 한 것입니다. 60살은 은퇴의 나이인데도 60 넘은 할머니 같은 분이 늦둥이라는 가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처절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새끼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키우겠다는 것을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당시에 도시에 살던 형들이 몇 있었지만 한참 가정을 꾸려야 했으니 동생한테 학비를 보태줄 형편이 안되었고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어머니를 잘 챙기는 형이 있지만 형제들도 어머니를 돕다가 겨우 정착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당신도 막동이 학비마저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식들 사정이 그렇다보니 막동이가 졸업할 때까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버텨야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농사 말고는 할줄 모르던 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잘 사는 가정집의 식모나 식당일이 전부였습니다. 막동이도 대학에서는 기죽지 않으려고 어머니의 직업에 대해서는 어떤 친구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막동이 처럼 어려운 처지를 말하는 친구도 일부 있었지만 막동이는 없어 보이는 가정사(!)를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학교 생활의 씀씀이 조차도 일부러 빈티를 내지 않으려고 용돈이 필요할 때마다 미안한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요청하여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습니다. 막동이는 어머니가 이왕 고생하시니깐 최소한 생활할 만큼 돈을 쓰자는 생각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50만원 월급 받으면 50만원을 그대로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았습니다. 백퍼센트 자식을 위해서 모았고 최소한 막동이 졸업식까지는 벌어야 겠다고 했으며 버는 족족 자식들한테 썼습니다. 막동이는 당시에 일기를 쓰기나 편지를 자주 쓰던 터라 거의 한달 간격으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안부와 잡다한 대학 생활 이야기를 보냈습니다. 말 그대로 촌놈이 대학생활에서 새롭게 느끼던 사소한 이야기를 주로 썼습니다. 어머니가 일하던 곳은 "함바"라고 불리는 공사장 가건물 식당이었는데, 주소가 불분명한데도 막동이가 편지를 보내면 한 통도 빠짐없이 전국의 어느 공사장 식당이라도 신기하게 어머니의 손에 배달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모자간의 정을 아셨는지 막동이가 보낸 편지는 한 통도 빠짐없이 어머니한테 배달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키가 150 정도로 꽤 작고 얼굴도 힘없어 보이는 인물이지만 정신력은 정반대로 초금속보다 단단하였습니다. 전국 공사장 함바 식당을 오가는 사람들이 거칠더라도 자식에 대한 책임 때문에 무조건 버텨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예상되는 파란만장한 시련을 생각했는지 여자들이라면 다 쓰는 브래지어 한 개도 없이 살았습니다. 오남매를 키우는 동안에는 입에 풀칠하기 조차 힘들었으니 생전에 놀러갈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을 정도로 모진 분이었다.  함바 공사장에 막동이가 하얀 제복을 입고 먼지나는 공사장에 나타나면 어머니에게 커다란 자부심과 정신력이 충전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막동이가 제복을 입고 다녀가면 어머니를 얕보던 몇몇 인부들이 이후부터는 빈정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은 겉보기에 못나게 보이더라도 자식 하나라도 똑바로 키우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있으니 허투루 접근하지 말라는 신호였습니다.   막동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 장교로 간 뒤에도 어머니한테 편지를 계속 보냈습니다. 막동이는 군장교로 있는동안 월급을 받으며 생활했으므로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 없었으나 어머니 스스로 자립하겠노라며 이후로 무려 10년 더 식모생활을 하였습니다. 60대 중반의 할머니 같으신 분이 자식 신세는 커녕 완전 자립을 목표로 자식들한테 뭐라도 보태줄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자식들이 어렵게 출가했으니 남은 자식의 결혼도 시키고 어릴적부터 밥벌이를 위해 쫓아낸 자식들한테까지 진 빚을 갚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집 떠나 객지에서 10년 가까이 돈 벌다가 결국에는 외롭게 시골로 돌아가서 혼자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생을 자식만을 바라보며 여유없이, 빈틈 없이 살아온 탓에 작은형 집과 막동이 집에서 몇 달 살아 보더니 "함께 못살겠구나" 하시며 스스로 시골로 가셨습니다. 죽을 것처럼 살아오신 분이 자식 내외와 잘 어울리기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혹독한 고생을 참아가며 공사장 식당과 식모생활을 해서 돈을 모았으니 자식들한테 신세 안지고 잘 살겠노라고 강조합니다. 막동이의 학비를 벌기 위해 식모생활, 함바에서 고생을 더 했으니 막동이는 매달 10만원씩 꼭 보내라고 합니다. 10만원이라는 돈 보다는 너를 위해 책임을 다했으니 보답으로 막동이도 어느 정도의 의무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식 식구들과 어울리지 못하여 따로 사는 것에 대해 미안하고 창피하게 생각을 하며 그냥 살아갑니다. 막동이는 막동이대로, 형제들도 멀리서 각자 편하게 지내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사는게 낫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본심은 다르기 때문에 막동이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오남매의 자식이 있지만, 어머니는 자식마다 각기 다른 인물과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막동이는 대부분 그렇듯이 집안의 귀여운 강아지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막동이는 어릴적부터 어머니가 멀리 외출하거나 시장에 물건을 팔러 갔다가 돌아올 즈음이면 거의 빠짐없이 마중을 나가곤 했습니다. 밭을 매거나 논일을 하면 일하는 내내 잡다한 이야기를 하거나 노래를 불러서 어머니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려고 떠들었습니다. 때로는 논일을 하면서 맨날 일만 하냐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맨날 집에서 공부하는데 막동이도 최소한 시험 전날에는 공부시간을 달라고 해서 어머니 혼자만 일하게 놔두고 막동이 혼자서 집에서 놀기도 했습니다. 막동이 양심에도 공부하겠다고 했으면 최소한의 공부라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막동이가 졸라대는 자습서도 못사주고 공부할 시간도 별로 안주면서도 시험을 치고나면 반에서 5등 안에는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부할 여건도 별로 안주면서 성적에는 왜 집착했는지 모르지만 공부도 별로 안하고 대학까지 나왔으니 막동이는 나름대로 선방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이런 저런 이야기가 쓰여진 막동이가 보냈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면 힘이 난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라기 보다는 아버지처럼 그 정신을 본받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막동이는 어느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고 어머니한테도 편지를 써 본지가 너무 오래 되었습니다. 두어달 전에는 어머니께 인터넷으로 편지를 쓰면 인터넷편지배달 회사가 대신 편지를 보내주는 편지를 썼습니다. 대신에 편지 봉투에 광고가 달라붙는 게 맘에 걸리지만 아나로그 감성을 불러내기에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전단지 광고인 줄 알고 개봉도 하지 않다가 며칠 뒤에 열어 보시더니 오랜만의 편지에 좋아했습니다. 자식들이 떨어져 지낼 수록 자주 찾아볼 수 없다면 꾀를 내어 편지나 전화라도 하면 좋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엔 당신이 나이가 들 수록 자식들한테 사랑 확인을 가끔씩 하십니다. 아직도 어머니를 쥐꼬리 만큼이나 생각은 하고 있냐고, 어머니를 어머니로 여기고 있냐고. "너그떨 아직도 어머니 생각하고 있냐 ? 난 너그떨이 어머닐 잊어버린 줄 알고..."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에 자식에 관한 것 외에는 없습니다. 시골에서 혼자 소일하다 너무 힘들면 그 때마다 자식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십니다.  그 등살에 며느리들은 죽을 맛이지만 혼자 사시는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충실하게 헌신적이던 막내형한테는 심한 고부관계로 인해 가정상황이 좋지 않지만, 식구를 위한 어머니의 필살기 노력을 생각한다면 막내형도 언젠가는 극복하리라 생각합니다.   막동이는 아버지가 되어어 비로소 부모의 존재이유를 조금 깨달았고 어머니의 헌신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 혹독한 수십년을 버텼는데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버린 어머니의 존재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바라면서 혹독한 세월을 버텼을까요?. 어머니께 할 수 있는 효도는 아주 쉬운데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다짐을 하지만 뒤돌아 서면 또 잊어버리는게 자식의 마음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번에는 한번 편지를 써보겠노라고 다짐합니다. 자식의 편지를 읽으며 잠시라도 기뻐할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2002년 4월 광팔이라는 막동이가 씀]      

    by 오광신 2002.03.27 0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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